오리와 오리(5里) 걷기: 기계장치와 상호작용의 미학
알록달록하게 물감으로 칠해진 나무오리가 길을 걷는다. 생각보다 느리다. 작은 턱에도 맨홀 뚜껑에도 방향을 헤맨다. 걸음마 시기 아이처럼 조심스러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린 속도에 맞출 수밖에 없다. 시각예술가 김동현이 만든 오리 로봇 ‘나다니엘’에 관한 이야기다. 5월 26일 송파동 작가의 작업실에서 아트잠실까지 “오리와 오리(5里) 걷기”에 동참했다.
흥미롭게도 나다니엘은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고 말을 건넨다. 영락없는 아이 목소리로 내뱉는 말은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깝다. “너는 얼굴이 매우 크구나”, “네가 믿음을 가지면 태산이라도 옮길 거야”, “때로는 낙엽을 밟는 것도 좋아.” 밑도 끝도 없는 랜덤의 대화이지만 오리 로봇과 마주 보고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경험이다. 때로는 건넨 말에 정확하게 반응할 때도 있다. 물론 얻어걸린 격이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쾌감을 느끼거나 큰 위안을 받기도 한다.
오리 로봇은 여정에서 허리가 아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쉬고 있는 아주머니와 꽤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한 아이는 오리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영어 학원에 늦겠다며 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안타까워하며 지나치기도 했다. 작가는 매일 작업실로 출퇴근하며 마주치는 석촌 호수에서 무리 지어사는 오리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 오리 로봇에는 오리의 시선이 촬영되는데, 사람의 시선과 대비되어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쓸모없는 박스>
아트잠실에서 열린 전시 <❝5➥里❞>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전시장에 도착한 오리 로봇은 전시 기간 동안 매일 관객 한 명과 대화를 나눈다. 전시장에는 작가의 또 다른 작업 <쓸모없는 박스>이 기다리고 있다. 작품의 원리는 단순하다. 상자에는 세 개의 스위치가 있고, 그중 스위치 한 개를 켜면 상자가 열리고 기계장치의 손이 나와 스위치를 끈다. 인공지능 연구의 개척자인 마빈 민스키 박사의 로봇 모델을 활용해 만든 작품이다. 스위치를 켜야 작동하는데, 기계 스스로 전원을 꺼버린다는 점에서 심지어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관객은 오리 로봇과 대화를 나누고, 상자 로봇과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신경전을 벌이며 나름의 상호작용을 한다. 또한 작가, 기획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을 음미할 수 있다.
세상의 보편적인 구조, 우주의 근본 원리 등에 관심은 김동현의 초기 회화 작업에서 엿보인다. 그는 에너지의 파동을 몬스터에 비유해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의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강렬한 색감에 여백 없이 화면을 가득 메운 그림이 특징적이다. 작가는 2010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조합해 새로운 생명체를 만든다’는 설정으로 오토포이 박사의 연구실을 차렸다. 오토포이는 생물학적 용어인 ‘autopoiesis’에서 온 것으로 생명체가 끊임없이 자기 세포를 증식(self-creation)한다는 개념이다. 그해 성곡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작가는 몇 톤에 달하는 장난감을 자유분방하게 변신 합체하며 유희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다양한 생명체를 만들었다.
기존의 작업이 온갖 잡동사니가 뒤엉켜 에너지를 끊임없이 확장하는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012년 제작한 <질문을 준비하는 티라노사우루스>부터는 기계장치가 등장하면서 작가는 역동적인 움직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재료도 다양하다. 버려지거나 유행이 지나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 새롭게 움직이는 존재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이 참여해 작품을 직접 움직이는 행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에너지의 움직임이 확장되어 작품에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역동적인 힘의 관계는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김동현은 최근 작업에서 관객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과 사회적 관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나의 장치를 만든다. 실제로 크리스마스이브 때 전시장을 방문한 한 관객은 자신의 뇌파를 감지해 비커에 담긴 바닷물의 pH값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를 연주하는 작품을 감상하다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평생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는데, 자신의 뇌파가 기계장치를 움직여 하나의 음악이 되는 경험을 통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작업의 기계장치가 복잡하고 정교해지면서 작가는 엔지니어와 소통하기 위해 과학 기술에 관한 연구를 계속한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제 예술가는 무언가를 혼자 생산하기 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면서 작업을 왜 하는지 그 방향성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팬더믹 상황은 작가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되었다. 작업 외에도 시민들이 참여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작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전시장 바깥으로 작품을 들고나왔다. 오리 로봇이 시흥 갯골생태공원을 찾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작업 <이카로스의 날개>가 그것이다. 연구실에서 실험만 하던 괴짜 박사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셈이다. 작가는 훗날 인공지능 오리 로봇을 만들어 전국 투어를 하고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하고 싶다고 밝혔다.
Curatorial Review
미술평론가 이슬비 (2020)
오리와 오리(5里) 걷기: 기계장치와 상호작용의 미학
공생 - 자연을 주체로 전환하는 하나의 방식
1. ‘보이지 않는 것 / 들리지 않는 것’의 시각화
작가 김동현의 작업은 마치 마술과 같다. 엉뚱해 보이는 곳에서 느닷없이 꿈틀대는 생명이 발아할 뿐만 아니라, 예기치 못한 곳에서 잔잔한 자연의 소리가 넘쳐흐르고, 유연한 운율에 몸을 실은 감미로운 음악마저 피어나기 때문이다. 자연에 내재한 신비로운 ‘그것들’은 대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것들’이지만, 작가 김동현이 부리는 마법의 주술에 의해 ‘보이는 것’으로 때로는 ‘들리는 것’으로 태어난다. 그런 면에서 김동현은 현실계의 자연에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시각화, 청각화’를 꾀하여 관객에게 그것을 전해 주는 ‘예술적 영매(靈媒)’라 할 것이다.
작가 김동현은 마치 마술사나 영매처럼 ‘차안’에 잠재하는 기(氣) 혹은 에너지와 같은 ‘보이지 않거나 쉬이 읽히지 않는 것들’을 뇌파와 같은 임피던스(impedance)의 유형으로 ‘피안’의 세계를 불러내어 관객 앞에 선보인다. 예를 들어 작품 〈Water counterpoint No. 2〉(2018)에서 작가는 물방울을 상징하는 육각의 돔 형태로 된 나무 구조물 안에 경기도 안산의 ‘시화호’ 열 곳에서 채취한 바닷물을 비커(beaker)에 담아 마치 실험실처럼 꾸몄는데, 관객의 뇌파를 감지하는 센서를 통해서 여덟 개의 모터를 달리 움직이게 만들어 각 비커에 담긴 바닷물의 ph값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를 연주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작업은 그녀가 ‘오토포이 박사의 연구실’이라는 재기발랄한 작명 아래 ‘에너지를 조합하여 새로운 가상의 생명체를 만드는 상상력’을 실험했던 이전의 연작이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된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 ‘대위법(counterpoint)’이라 작명한 이 시리즈 작업은 흥미진진한 ‘공상 과학적 상상’으로부터 인간의 삶과 사회를 보듬어 안고, 성찰하는 ‘은유적 상상’으로 변화되는 지점에 성큼 들어서고 있다고 하겠다. 김동현은 작품 속에서 자연을, ‘인간에게 대상화된 존재’로부터 스스로 말하고 사유하는 ‘인간과 대등한 존재’로 전환한다.
2. 상호 작용 혹은 공생
그녀의 또 다른 작품 〈Plant synth〉(2018)을 보자. 이 작품은 일명 ‘수경 재배 타워’ 안에서 배양되고 있는 식물을 관객이 접촉할 때, 센서가 관객의 뇌파를 측정하여 각기 다른 연주를 들려주도록 만든 작품이다. 식물에 의해서 인간의 뇌파가 포착되고 분석된 셈이다. 이것은 주체와 대상의 역전인가? 일견, 이 작품은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가 인용하는,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라는 세잔의 언급을 되뇌게 한다.
김동현은 이 작품을 통해서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을까? 그녀는 말한다. “이것은 자연과 사람과의 공생 관계를 순간적으로 드러낸 작업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식물을 만져도 소리는 늘 다르게 나는데 이것은 사람의 주파수가 늘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주파수와 자연의 주파수가 맞부딪히면서 창출하는 상호 작용의 반응은 언제나 다르다. 김동현이 음악 용어인 〈대위법(counterpoint)〉을 연작의 이름으로 삼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녀는 ‘인공 vs 자연’, ‘인간 vs 환경’이라는 이름으로 대비되었던 ‘인간과 자연’을 공생의 동반자로 ‘동시에, 함께’ 초대한다.
3. ‘모종의 시스템’과 깊이의 세계
특히 작가 김동현은 관객의 참여를 통해 작품의 움직임을 구현함으로써 관객과의 적극적인 상호 작용과 소통을 도모한다. 구체적으로 작가는 움직임에 반응하는 센서를 통해서 관객에게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작품을 맞닥뜨리게 하여 흥미를 유발하거나, 자신의 참여에 의해서 작품이 변모되고 있다는 인식을 관객에게 부여함으로써, 작품 감상의 몰입도를 드높인다.
이렇듯 작가 김동현은 창작자임과 동시에 작품과 관객 사이를 매개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모종의 시스템’을 구축해 나간다. 그것은 일련의 ‘자동화 시스템’으로, 작품 〈Counterpoint #1〉(2018)이나 〈카르마 기계-오토리버스〉(2018)의 경우처럼 커다란 카세트테이프가 반복적으로 양방향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종의 시스템’ 구축에서 무엇보다 주요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훌륭한 기술이기보다 그 건조한 기계의 구조로부터 인간의 소통을 견인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뇌파나 바닷물의 ph농도의 변화에 따른 반응과 같은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무엇들’을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품 속에 개입시킴으로써 깊은 존재적 성찰과 인식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은 메를로 퐁티의 철학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로 파악되고 있는 ‘깊이(profondeur)’의 세계와 닮아 있다. 그의 ‘보이지 않는 것(혹은 들리지 않는 것)’의 내부에서 ‘깊이’의 세계가 관객과 지속적으로 열리는 또 다른 작품들을 우리가 기대하는 까닭이다.
Art Criticism
김성호 (미술평론가, 2019)
공생 - 자연을 주체로 전환하는 하나의 방식
작가 김동현의 작업은 마치 마술과 같다. 엉뚱해 보이는 곳에서 느닷없이 꿈틀대는 생명이 발아할 뿐만 아니라...
감각의 통합체, 울림으로의 관계성
하나의 예술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이때 개시(開示) 즉, 세계가 ‘열린다’고 하였다. 이때 세계는 공간이 아닌 하나의 장(場)이다. 김동현에 의해 열린 장은 고대 그리스와 맞닿아있다. 피타고라스로부터 시작된, 예술은 예술철학을 다루는 것이며, 사회의 규율을 회복시키는 것이라는 대이론. 그래서 예술 속에 버무려진 조화와 화음, 비율, 질서 등은 결국 우주의 코스모스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김동현의 사유는 우주를 향한다. 작가 자신이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물질들을 조합하고 물리적으로 연결하여 상호작용하는 그녀의 작품들은 결국은 우주의 원리를 시각화하는 것이다. 물론 20세기 들어와 이 대이론은 붕괴되며 예술의 비획일화와 다양성으로 끝임 없이 자가 확장한다. 공유된 예술철학이 없는 아방가르드는 예술은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고, 미메시스mimesis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예술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렇다면 김동현이 구현하는 움직임. 무수한 장치와 연쇄반응에 의한 움직임. 그것들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김동현의 작품은 장 팅겔리Jean Tinguely나 혹은 테오 얀센Theodorus Gerardus Jozef "Theo" Jansen의 작품들과 중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과는 극명하게 다른 지점을 알아채기 위해선 그녀의 지난 궤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흔히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술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그 규정을 통해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술적 경험들을 모두 귀납적으로 모아서 예술의 속성을 규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전자는 예술에 대한 자의적 규정이 될 가능성이 높고 후자는 너무 많은 영역을 포섭하여 정작 예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는 실상 예술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하고 그 차이는 예술적 경험의 차이에 기인한다. 작품의 존재방식은 작가의 변화하는 양식 mode에 기반한다. 즉, 김동현의 의식이 어떤 앎의 장, 어떤 예술세계를 펼치는지 김동현의 의식과 경험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김동현에 의해 드러난 현상, 즉 그녀의 예술세계는 예술가 자신과 작품에 의해 드러나고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김동현은 회화에서 키네틱으로 존재방식을 변모해 왔다. 물론 지금도 그 작업들은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변화의 동인을 이해하는 것은 작품의 다양한 존재 방식과 그 존재방식의 차이가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삶을 살다보면 어느 순간 의도치 않게 무언가와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예술가에게 그것은 태초의 빛이 되기도 한다. 굳이 신경과학자인 라마찬드란V.S. Ramachandran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는 예술을 ‘초자극’이라했다) 자극이 오는 것은 현실reality, 즉 일상이다. 『유리알 유희』(헤르만 헤세),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녀의 성장과정을 관통했던 책과 그림들은 천주교 신자이자 다독(多讀)가인 그녀에게 더 깊이 더 깊이 생각하라고, 그리고 예술가로서 네가 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어떤 분위기로 이끌었을 것이다. 분위기로 채색된 사물들은 그녀에게 예술적 빈터를 만들었고, 사물의 내면을 응시하게 하였다. 그것은 점차 사회적 시스템의 조율과 연결된다. 내부와 외부의 공간. 물리적 연장 공간과 무한히 응축된 관계망들이 형성된 내재적 공간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삶이 표현되면서 물적으로 나타한 것이 바깥 세계이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광활한 우주는 고스란히 거인의 내부로 들어앉았다.
IMF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시절에 학교를 졸업 후 디자인영상회사에 취직한 그녀는 작업과 레슨을 병행하다 2007년에서야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초기의 컬러풀한 회화는 그때 나왔으며, 1년 만에 100여점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이때 회화작품들은 명도가 높은 색체로 구불구불 연결되는 내장들로 가득 찬 고래의 형상이다. 이 형상들은 처음부터 계획되어진 것이 아닌 무의식을 따라 무작위로 반응하는 손에 의해 완성된다. 이것은 소우주다. 우주는 고래의 내장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전체의식에 개개인의 의식이 상호작용하는 우주의 연쇄반응을 담는다. 2011년에 현재 작업의 모티브가 되는 꼴라쥬 설치 작품 <질문을 준비하는 티라노사우스>가 등장한다. 이때부터 에너지의 전달이 전체를 움직이는 그래서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그녀의 철학이 외부 자극에 의해 촉발되는 키네틱으로 변환된다. 김동현의 회화 작품들이 오케스트라에 의해 터져나오는 웅장하고 화려한 기교의 교향곡이라면 이후의 설치, 키네틱 작품들은 마치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같은 느낌이다. 절대 음감과 리듬, 평균율, 대위법 등 바로크의 형식과도 같이 한 치 오차도 없는 새로운 기계적 시스템으로 변주된다. 물론 회화와 마찬가지로 예술기계장치에서도 결과는 예측되지 않는다. 작품을 마주하는 개별 자아의 에너지 파동은 각각의 매개변수가 되어 열린 시공간과 공명한다.
김동현이 스스로에게 명명한 “Autopoisis”는 생물학명으로 ‘자기창조’(self Creation)’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예술가로서 작품을 창조하는 동시에 우주를 창조하는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일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끊임없이 과학적인 방법을 연구하고 차용함으로써 스스로 재창조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기존의 알(시스템)을 깨부순다. 손으로 만지거나 또는 핀볼을 쏘아 올리는 자극으로 구동되는 수동적인 형식논리에서 최근에는 아두이노arduino라는 전자장치가 결합한 오토마타Automata의 구조를 선보인다. 눈에 보이는 않는 의식층은 전자파동으로 변환되고 이는 다시 음파로 환원된다. 얽히고 섥힌 기계장치는 그 자체로 사회적 시스템을 드러낸다. 사회질서는 곧 우주의 질서로 이 진화의 과정에 작가가 개입하고 있음을 천명한다. 그녀는 이것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역할이라고 분명하게 얘기한다.
어쩌면 김동현에게 있어 예술적 형식이나 기교, 그 과정에 관객참여는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장 팅겔리가 현대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에서 용도 폐기된 쓰레기를 존재도구로 사용하고, 테오 얀센이 물리학적 메카니즘을 예술적 가치로 구현하기 위한 기계생물체를 창조한다면 김동현은 세상을 비판하기 보다는 즐거움으로 연결되는 구조를 희망하고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맥락을 조율하는데 집중한다. 그녀에게 있어 예술은 혁명이 아닌 ‘공동체 삶’의 표상이자 새롭게 의미 맺는 방식으로서 울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가 꿈꾸는 예술세계는 세상의 모든, 동시에 개별적인 감각의 다양성을 통합체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올 해 그녀가 시흥에서 3명의 작가들과 협업하며 새롭게 시도하는 <올빼미의 이상한 집>(가칭)에서는 인간과 기계장치의 관계맥락을 넘어 자연 동력을 근원적 에너지원으로 가져올 계획이다. 방주 혹은 집이 될 공간전체가 어떻게 우주의 호흡과 조응할지, 그 기계적 메커니즘 방식에 대한 접근은 무엇일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테오 얀센이 말한 것처럼 예술과 공학 사이에 있는 장벽은 우리 마음에서만 존재하는 것일 터, 오토포이 박사가 펼칠 그 모든 장벽을 넘어설 도전에 응원을 보낸다.
Art & Cultural Criticism
황우자 (문화기획자, 2017)
감각의 통합체, 울림으로의 관계성
하나의 예술작품을 마주한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하이데거는 이때 개시(開示) 즉, 세계가 ‘열린다’고 하였다.
가상의 생명체를 만드는 오토포이 박사의 실험실 (Autopoi’s Lab)
김동현은 다양한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전체적인 기관을 작동시키는 회화, 키네틱 구조물, 설치 및 공간작업을 하는 작가다. 이 작업들은 아날로그적인 기술에서부터 모터 동력 기어시스템을 경유하여 최근 첨단 기술까지 점차적으로 복잡해지고 있다. 제일 먼저 김동현의 작업은 유기적인 생명체의 내장기관을 연상시키는 회화에서부터 시작됐다. 생명체의 내장기관회화는, 유기적인 구조들이 화면을 가득 매우는 방식으로 표현된 추상화로 전체를 보면 하나의 우주처럼 보이고 부분을 들여다보면 독자적인 기능을 가진 내장기관처럼 보인다. 이 추상적 회화는 ‘하나의 생명체에 온 우주의 성질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가 모티브로 표현했던 내장기관 이미지들은 거대한 우주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평면에 이미지로 존재하던 유닛들은 박스형태의 공간이나 평면위에 겹쳐진 오브제로 바뀌었다. 이 내장기관 이미지들은 기계장치에 연결된 모터를 만나기도 하고 고무동력이나 컴퓨터 프로그램, 혹은 센서를 통해 동조되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파편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들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결되면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해 가게 된 것이다. 작품들의 이면에는 작은 톱니바퀴들이 장착되어 있어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움직임은 우주가 운행하는 원리를 찾고자 했던 근대의 기계론적인 우주관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작가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자연과학적 믿음이 바탕이 된 이 생각은 김동현의 작업을 구상하는 중심개념이 되었다. 서양의 근대과학이 추구했었던 세계는 이처럼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였고 그 시대를 대변하는 기계적 기술이 김동현이 작업에서 응용한 기어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크랭크축을 이용한 그녀의 모터들은 직선 운동과 회전 운동을 통해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모터를 활용한 작업들이 구조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을 기반으로 했다면, 핀 볼 머신과 같은 관람객 참여형 인터렉티브 작업은 매우 불확정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세계로 던져진다. 모터 동력에 의해서 생성된 움직임은 관람자들의 참여를 통해서 하나의 놀이기구로 전환했다. 고무줄 동력의 힘을 이용해 핀 볼을 쳐 올리도록 만들어진 아날로그적인 장치는 익숙한 장난감처럼 손 안에 들어온다. 상파울로 출신의 외빈드 펠스트롬(Öyvind Fahlström)은 관람객들의 참여에 의해서 작품이 자유롭게 변형되는 인터렉티브 아트를 회화작업이나 설치작업으로 구현했다. 그에게 있어서 작업은 관람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이었다. 김동현의 작업도 딱히 고정되지 않고 부유하다가 멈추어 버리는 놀이기계를 닮았다. 현대적인 형태의 핀 볼 기계는 1930년경에 처음 만들어 졌다고 한다. 곰곰이 살펴보면, 김동현의 핀 볼 기계는 이 당시 만들어졌던 아날로그 핀 볼 기계에 가깝다. 더 멀리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옥외 경기장인 바가텔(Bagatelle)을 연상 시킨다. 당시에는 둥그런 모양의 돌과 언덕의 경사면에 땅을 파서 만든 구멍을 이용해서 경기를 펼쳤다고 한다. 김동현의 회화작품이 한 생명체의 내장기관에서 출발해서 거대한 우주를 투영하는 거울로 확장했다면, 핀 볼의 유동성은 전시장 전체 공간으로 확대된다. 전시 공간 전체가 바가텔의 놀이터로 둔갑하는 것이다. 그녀가 초청한 무용가가 금속 헬멧을 착용하고 공간을 임의적으로 유영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게 된 것은 이와 같은 핀 볼 기계의 움직임을 어떻게 전시 공간 속의 관람객들과 일치시킬까하는 고민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전시장 구석구석을 이동하는 퍼포머는 공간 전체를 핀 볼 경기장으로 전환함과 동시에 핀 볼이 접촉하는 작은 우주로서의 핀 볼 세계를 상상하게 했다.
김동현은 핀 볼 기계 작업을 넘어서 최근에는 메이킹 보드를 활용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도입한 작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런 작업들이 가능했던 것은 최근 과학과 예술가들의 융합 프로젝트나 전자기술 기반의 메이커스들의 출현으로 미디어 아트 영역이 매우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이들 공학전공자들이 예술적인 작업으로 확장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융·복합 프로젝트들이 늘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각자의 영역에 함몰된 상태에서 서로에 대한 편견만을 확인하고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고 두 영역 간의 단순 교차적 실험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김동현에게 있어서 흥미로운 것은 예술의 창조성과 과학의 창조성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은 나눠진 하나로 작업 전반에서 일체화 되어 있다. 김동현의 작업은 기술에 매우 의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든 기술은 어떤 조형적 움직임을 위해 정교하게 조정되어 있다. 어떤 움직임은 센서를 통해서 자동화 되는가 하면, 어떤 움직임은 버튼을 눌러야만 작동하도록 고안되었다. 기술 없이는 전혀 작동되지 못하는 무용지물처럼 보이다가도 기술 자체보다는 훨씬 더 본질적인 세계에 뿌리 내리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둘이 서로 공회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 둘은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김동현 자신의 프로젝트를 <오토포이 박사의 실험실>이라고 명명했다. 'Autopoesis'라는 말에서 비롯된 오토포이 박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조합해서 가상의 생명체를 만드는' 과학자다. 예술과 과학을 결합하는 실험실로 보이는 이 프로젝트는 움직임에 집중하고 있다. 게다가 이 움직임은 다양한 조형물을 통해 표출되었다. 초기 내장기관 같은 회화작업에 등장했던 요소들이 컬러풀한 색채와 함께 때로는 곤충 같은 모양으로, 때로는 로봇이나 공룡 같은 형태를 띠고 등장했다. 이 조형물의 재료 또한 나무, 플라스틱, 금속이나 자연물 등 다양한 요소들이 혼성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녀의 회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색체의 유기체들만큼이나 혼성적인 오브제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꿈틀거린다. 이 구조물들은 특유의 공간 안에 마치 SF영화에서 등장하는 한 장면처럼 그곳에 둥지를 틀고 관람객의 움직임을 감지하자마자 생명을 얻어 살아난다. 이 사물들과 무용가의 신체가 뒤섞이면 이것이 공연장인지 전시장인지 더 나아가서는 기계의 몸속인지 바깥인지 구분조차 어렵다. 이렇게 사물의 움직임은 인간에게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이와 같은 상상력은 사물이나 물체가 살아 있고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원초적인 ‘애니미즘’적 믿음에 기반을 둔 것이다.
초기 키네틱 아트를 실험했던 예술가들은 사물의 기계적인 움직임이 내포하고 있는 ‘시간성’에 주목했다. 도심 한복판을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함께 가로지르는 기관차의 증기처럼 스펙터클한 광경도 있었겠지만, 마르셀 뒤샹이 심심할 때 손가락으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고안된 자전거 바퀴의 고요한 움직임도 있었다. 원탁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결합한 아날로그적인 뒤샹의 자전거 바퀴는 흘러가는 시간을 보여 주었다. 핀 볼이 구조물을 따라 이동하는 경로를 주시하는 것, 곤충모양의 구조물이 꿈틀거리거나 날개 짓을 하는 것을 재현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오늘날과 같이 기계적인 움직임이 편만화된 시대에는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는 키네틱 아트 작업은 매우 정교하게 고안되지 않으면 작동되지 않는 기계적인 움직임이나 컴퓨터 기판을 통해 프로세스를 구상해야만 하는 기술적인 완벽성을 요하는데, 김동현의 작업들이 작동되는 상태는 매우 임의적이고 가변적이다. 핀 볼 기계의 피스톤은 고무줄로 고정되어 있어서 그 탄성을 정교하게 조정하기가 쉽지 않고 튕겨진 구슬은 제 맘대로 움직이다가 예기치 않은 곳으로 빠져나가 버리기가 일쑤다. 김동현의 기계들은 그런 측면에서 자연에 가깝다. 나무로 깎아 만든 기어바퀴나 오브제들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현대문명의 그것보다는 동물의 힘으로 열고 닫는 수문이나 고대문명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유물 기계들을 닮았다.
이처럼 그녀의 작업이 키네틱이나 인터렉티브 설치 형식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지자, 최근에는 관람객 참여형 프로젝트들로 확대되고 있다. 올해 전시에서 새롭게 선보인 PCM프로젝트(Pinball chocolate mach)는 타틀린의 제3세계 기념비처럼 생긴 구조물의 상층부에서부터 굴러 내려오는 쇠구슬 핀 볼 기계를 응용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여기서 관람객은 단순한 게임을 넘어서 구체적인 보상과 관계 맺는 상태에 놓인다. 그녀의 작업노트에 따르면 '나의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을 물리적,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며, '하나의 힘(input)이 다양한 장치들과 연결되어 여러 힘과 움직임으로 변환(output)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역동적인 힘은 작가에게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도 직접 체험되어야 한다. 분과 과학의 시대에 어느 누구도 통달할 수 없는 다양한 원천을 희한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오토포이 박사는 괴짜, 엉터리, 사기꾼, 몽상가, 이상주의자 등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부분 부분은 합리적이지만, 전체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산물은 오토포이 박사의 발명품을 예술과 중첩시킨다.
Curator’s Note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2016)
가상의 생명체를 만드는 오토포이 박사의 실험실 (Autopoi’s Lab)
김동현은 다양한 부분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전체적인 기관을 작동시키는 회화, 키네틱 구조물, 설치 및 공간작업을 하는 작가다.
구르는, 또는 굴려지는 세계
김동현은 11월 말 열린 2015 창조경제박람회(2015 Maker Festival, 코엑스 홀)에서 2014년에 시작한 핀볼 머신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토 타입의 기계를 선보였다. 관객이 바탕에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핀 볼 머신에서 볼을 쏘아 올려 양 손으로 측면의 레버들을 탁탁 치면서 종을 맞추면 롤링 볼 머신이 작동하여 중력에 의해 볼이 가장 아래로 내려오면 초콜릿이 나오는 시스템이다. 그것을 작동해보기 위해 줄지어 선 모습은 통상적인 미술 전시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러한 ‘즐거움과 유희’는 김동현의 키네틱 설치작품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한 관객 참여에 대한 기대가 미술작가로서는 버거울 수밖에 없는 과학 기술의 영역에 손을 뻗치게 했을 것이다. 적극적 참여든 수동적 소비든, 대중의 상호작용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끌어내는 분야는 과학기술이다. 관객참여에 대한 기대치를 가진 예술이 과학기술 분야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러나 김동현의 작품은 단순히 대중성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관객은 수동적 구경꾼이 아니라, 작품의 한 요소로 포함되어 있다. 관객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연쇄반응의 한 요소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관객의 참여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특히 그러한 참여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일 경우에 그렇다. 새로운 표현을 위해 작가는 낯선 영역을 끝없이 개척해야 한다. 김동현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기에 익숙해질 틈도 없고, 익숙해질 만하면 이미 자신의 마음은 떠나있는, 합리주의와는 무관한 작업 스타일을 고수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 자체는 합리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성이 광기에 의해 둘러싸여 있듯이’(미셀 푸코) 합리주의를 추동하는 것은 비합리주의이다. 그리고 비합리주의는 합리적인 수단으로 관철되곤 한다. 처음에는 무작정 시작했지만, 이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수많은 협업을 진행해왔고, 그래서 작가로서 과학기술자와 과학자들이 모여 있는 박람회에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상상하고 과학자는 증명한다’지만, 김동현은 자기 안에 두 과정을 합치고 싶어 한다. 다른 분야와의 협업도 작가가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야 가능하다. 양자의 접속부위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양자는 겉돌고 서로를 도구화시키는 선에서 끝난다. 관찰과 실험이라는 근대과학의 방식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에도 공통적 유산이 되긴 하였지만, 일단 두 분야의 언어가 크게 다르다. 물론 언어란 상호 번역될 수 있지만, 일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예술에서 발견되듯 언어란 극히 불투명하다. 새로움과 진보라는 현대의 보편적 가치 역시 각각 다른 기준으로 평가 및 의미화 된다. 굉장한 명분을 가지는 그 수많은 예술+과학의 협업이 양쪽에서 투입한 에너지에 비해 빈약한 성과를 내는 이유다. 대개 양자의 만남은 피상적이고 장황한 장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새로움은 경계 사이에서 만들어지기에 도전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과학은 철저한 분업에 의해 추동되어 왔고, 그것이 막강한 생산력의 진보를 가져와서 이후 인간 활동의 가장 강력한 모델이 되어왔지만, 이 과정을 통해서 정작 예술은 빈약해 졌다. 오늘날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부류의 예술가/과학자를 기대하긴 힘들다. 미술은 미술계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장식 아니면 계몽으로 버티고 있을 따름이다. 장인에 머무르는 장식은 기생적이고, 보편적 지식인에 머무르는 계몽은 비효과적이다. 예술가가 감당하기에 하나는 너무 지엽적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과도하다. 예술은 하나의 영역에 자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영역을 담당한다. 미지의 영역이라는 속성은 ‘아방가르드’라는 말을 예술 쪽에 속하게 했다. 이때 예술은 과학이든 종교든 신화든 무엇이든 끌어올 수 있다. 그 결과물은 분과 과학도 (분과)예술에도 속하지 않는다. 추상적 공간에 속하지 못함, 속할 수 없음은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현실화하려는 집요한 움직임을 낳는다.
현실에서 현실, 관념에서 관념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출발 했던 지점과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이 중요하다. 정체성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이러한 경계 위의 게임만이 동일성의 재현이 아닌 이질성의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도달지점이 예측 불가능한 무모함은 작가의 약점이 아니라, 장점일 수 있다. 예술은 모든 무모함에 바쳐진 이름이다. 과학의 경우에는 너무 많은 인력과 조직, 자본이 요구되기에 모험이 힘들다. 그러나 일단 어떤 임계점에서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면 그 파급효과는 매우 크다. 과학자체가 세계 공통 언어로 구동되는 강력한 연결망의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김동현은 내년에 이를 4배로 확대하여 전체 공간을 작은 쇠구슬이 주파하는 연쇄반응 장치를 만들 예정이다. 올해 시험적으로 선보인 프로토 타입의 기계는 정교한 장난감 같은 모습에 머물렀지만, 그것이 관객이 속한 전체 공간을 가득 채울 때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비유하는 예술 기계로 보여 질 것이다. 중력에 의해 움직여질 작은 구슬은 우주에 보편적으로 내재하는 힘(중력)을 발견한 뉴턴처럼, 딱딱 맞아 돌아가는 시계 같은 우주를 그려낼 것이다.
그것은 경이로운 기계로서의 우주지만, 누가 기계를 만들고 왜 그렇게 작동시켰는가의 문제는 열려있다. 우주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최초의 물리학자인 뉴턴이 말년에 연금술과 신학, 고대 역사에 심취한 기이한 면모를 보인 것은 그가 세계의 이면도 볼 수 있는 진정한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동현의 작품에서 주어진 계 안에서 미친 듯이 튀는 핀 볼의 배경은 고래 내장의 모습이다. 내장 안의 물고기들은 우주 안에 또 다른 우주가 겹겹이 내재해 있는 우주를 상징한다. 작가에 의하면, 우리의 세계는 고래의 내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가 모든 것이 하찮고 허무하다는 사고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이어져 있다는 사고는 아무리 미소한 것도 자기 역할이 있음을 말한다. 다만 이전시대와 같은 계층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각되는 수평적 관계는 해체로 보일수도 있지만, 그 역시 또 다른 관계임은 분명하다.
인간 또한 이 연쇄고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중요성이 너무 과장되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사고를 낳기도 했지만,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고를 전복시켜 간 것은 과학적 사유이다. 전통적으로 전체에 대한 사로를 담당해 왔던 것은 신화나 종교였지만, 근대 이후 종교의 역할을 이어받은 것은 예술이었다. 가장 경쟁력이 있던 과학도 적절한 서사로 번역될 경우에만 그러한 비전을 담을 수 있다. 오늘날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과학 담론은 과학 사상가들의 필력에 의해 전달된다. 그러한 서사는 지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문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타 분야의 사람들이 과학을 접하는 경로가 그렇다. 김동현 역시 이러한 작품을 하기 전에 생물학이나 물리학 같은 분야에 대한 독서를 꾸준히 해왔다. 그것이 미학이나 미술사를 학습하는 것 못지않게 예술에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술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독서와 실행의 인과관계가 있다.
작품의 낱낱이 어떤 이론의 번역이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식에 대한 느낌을 상징화하는 것이다. 핀 볼 머신을 활용한 작품에서 우주 전체는 하나의 망으로 간주되었고, 누군가 에너지를 불어넣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볼이 과녁을 맞추면 연쇄작용에 의해 결과물이 주어진다. 지금은 동전모양의 초콜릿이지만, 운동의 촉발자에게 주어지는 작은 선물의 내용물은 다른 무엇으로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방점이 찍혀 있다 보니 마지막 과정이 다소간 밋밋한 것이 흠이다. 그러나 작품의 규모가 커지면 좀 더 다양한 결과물과 그 결과에 따른 또 다른 피드백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동그란 구의 움직임과 둥근 초콜릿은 유사한 형태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핀 볼과 롤링 볼 머신 옆에 관객들이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는 딱지 형태의 컵받침도 둥글다. 하기야 돈도 둥글지 않은가. 둥근 형태는 처음과 끝보다는 무한한 과정을 강조한다. 공처럼 막힘없이 계속 굴러가게 하는 것이 이 체계의 목표다.
유사한 형태는 유비적 사고를 이끌며, 그 역도 성립된다. 현대미술 작가는 누구를 향해 발신하는지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끝없이 만들곤 한다. 작업에 대한 무모한 사랑으로 투입된 그 무한 에너지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는 있을 것인데 그곳이 어디인가. 상품이나 노동처럼 단위당 명확한 가격이 매겨져 있는 것도 아닌 작품과 예술이 운명처럼 지고 가는 이 질문은 상징적 차원으로나마 도해될 필요가 있다. 김동현이 활용하는 핀 볼 머신은 작가가 고안한 물리적 장에서 에너지가 흘러가는 궤적을 보여준다. 그 궤적을 좀 더 길게 늘리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궤적이 길어질수록 의외의 요소가 개입될 수 있고, 우연은 정교한 장치로 구현된 필연과 상호작용하여 또 다른 변화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관객의 반응은 작가에게 피드백이 되어 다음 작업을 추동하는 에너지원이 된다.
김동현의 예술 기계는 중력, 운동, 마찰 같은 물리적 법칙을 활용한다. 특히 축을 따라 한 바퀴 도는 원형운동이 편재한다. 기묘하게도 이 원형운동은 하트를 닮은 도형을 만들기도 해서 우주에 충전된 에너지나 기(氣)같은 실재를 생각게 한다. 원형운동을 이용한 다양한 물리적 장치들은 순환을 만든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한 반복적 순환이 아닌, 형태는 같지만 움직이며 끊임없이 진화해 나가는 인간과 자연 전체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그 기본 메카니즘은 ‘Cardioid System’에 바탕 한다. 원형은 끝없는 연결망을 상징하는 도형이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주제는 그림으로부터 시작된 초창기 작업부터의 주제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있는 작업과정으로 변모한 후 몰입도는 더욱 커졌다. 미술가에게 익숙하지 않은 과학적 기술적 방법은 크고 작은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지식과 정보가 형식이 되는 과정이 작가에게 전에 없던 몰입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매 단계마다 절망과 기쁨이 교차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부분적인 것에 매몰되고 소진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오류를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나오는 산물이 있었다. 도전은 결과로만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서는 부차적인 것이 주역으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 역전은 너무 극적이어서 미술에서는 주변적인 것만이 남아있는 것 같을 정도다. 그러나 끈 떨어진 주변성은 말 그대로 주변에 머문다. 현재 미술계를 지배하는 것은 처음부터 포기된 도전정신이다. 그것이 그 나마의 위치를 보존하려는 현실적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김동현처럼 우주적 차원까지 생각하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있는 작가는 괴짜 취급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도면밀한 현실주의자보다는 다소간 어이없어 보이는 괴짜를 좋아하며 응원한다. 그래서 작가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작업경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것과 큰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거시적인 문제의식 역시 작가에게는 현실적 문제일 수 있다.
주변이 주변인 것은 중심과의 관계 때문이다. 비록 이 중심은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하며 끝없이 주변에 영향을 준다. 물론 주변이 중심에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에게는 계획하지 않고 그리는 그림처럼, 자연계의 리듬에 편승해서 그냥 가는 갈 때의 희열이 있었을 것이다. 자연 법칙을 실제 작품에 구현하려했을 때의 오차나 실수도 흥미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과학의 역사에는 그러한 예가 종종 등장한다. 오류도 체계의 요소이며, 모든 열린 체계는 오류를 또 다른 인자로 수용한다. 독재체제만이 의외의 것은 바깥으로 영구 추방하려며, 자신의 동일성을 고수한다. 국가 뿐 아니라 자아도 그러한 독재체제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 자아의 경우라면 편집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과학도 예술도 아닌 영역에 자리를 잡은 김동현은 자신의 정체성을 ‘오토포이 박사’에 투사한다. 오토포이 박사는 제로라는 유일한 부하를 거느리고서 언제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모를 연구에 밤낮 없이 몰두한다.
작가에 의하면, ‘Autopoesis’라는 말에서 비롯된 오토포이 박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조합해서 가상의 생명체를 만드는’ 과학자다. 그의 자기소개서에 따르면 ‘나의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는 시스템을 물리적,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며, ‘하나의 힘(input)이 다양한 장치들과 연결되어 여러 힘과 움직임으로 변환(output)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역동적인 힘은 작가에게와 마찬가지로 관객에게도 직접 체험되어야 한다. 분과 과학의 시대에 어느 누구도 통달할 수 없는 다양한 원천을 희한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오토포이 박사는 괴짜, 엉터리, 사기꾼, 몽상가, 이상주의자 등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부분 부분은 합리적이지만, 전체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는 산물은 오토포이 박사의 작업을 예술과 중첩시킨다. 그것은 비합리주의와 구별할 수 없는 합리주의 이후의 합리주의다. 변화는 체계의 경계, 또는 그 밖에서 추동되며, 체계는 이러한 변화를 증폭시킨다. 변화란 어떤 부문에서 일어나든지 예술적이다.
예술은 변화 그 자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취해왔다. 변화의 증폭이 가능한 것은 항목들이 모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계적 사고는 과학기술과 세계시장화를 통해 자연적, 문화적 생태계가 변모하면서 부각되기 시작해 ‘지구시대’(애드가 모랭)라는 용어도 만들게 했다. 사회학자 애드가 모랭은 [지구는 우리의 조국]에서 21세기의 ‘다시 잇는(re-lier)’ 사고를 제3의 종교라고 부각시킨다. 그것의 역할은 심연과 미지를 향해 활짝 열려있으면서도 합리성을 완전하게 이용하며, 그 기능은 단순이 이어주는 것이다. 저자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한다. ‘모든 사물은 원인을 제공받는 동시에 원인을 제공하고 도움을 받는 동시에 도움을 주고, 간접적인 동시에 직접적이므로 또한 모든 사물은 가장 멀리 떨어진 것과 가장 다른 것까지도 연결시키는 자연적인 관련성에 의하여 유지되므로, 나는 전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부분들을 알지 못하며, 마찬가지로 부분들을 알지 못하고서는 전체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시 잇기’ 작업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것을 확실한 토대 위에 체계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대화하는 것이다. 고대 이래 자연 자체는 운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자연을 이루는 요소들 사이에 벽을 세운 것은 근대 문명이다. 자연은 ‘유기체일 뿐만 아니라 과정’(화이트헤드)이다. 사물의 구체적 움직임에 기반 하는 김동현의 작품은 과정을 실체화 한다.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우주의 과정을 확장성과 목표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서술한다. 그에 의하면 확장성은 우주의 과정이 공간과 시간의 무대 위에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공간에 퍼져있고 시간에 따라 진행한다. 키네틱 아트에서 시간성은 중요한 요소다. 시간은 일련의 인과관계를 만든다. 둥글둥글한 궤적으로 가득한 김동현의 작품에서 인과관계가 직선적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녀의 작품 기반을 이루는 생각, 즉 모든 것이 이어져있다는 사고는 현대에 다시 발견된 ‘오래된 미래’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것은 모든 종교적 사고의 바탕이었고, 특히 18세기의 ‘존재의 대연쇄’라는 사상에서 두드러졌다.
아서 러브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서 자연라는 단어 다음으로 존재의 대 연쇄는 18세기의 성스러운 말이었으며, 19세기 후기에 진화라는 축복받은 단어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낙관주의적 세계관이다. 러브조이에 의하면 18세기 낙관주의자들의 공동 논제는 현세가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것이라는 명제다. 즉 ‘무엇이든 사물이 결코 다른 식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일단 우리가 알고 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견딜만한 것으로 바뀐다’(스피노자)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헤겔의 논리학이 말하듯이, 필연은 자유일 수 있다. ‘신의 주사위 놀이’(아인슈타인)--고정된 인과관계보다 확률을 중시하는 현대물리학에서 그 주사위는 원자구조처럼 둥글게 생겼다고 말해진다--처럼 유희적 요소가 있는 김동현의 작품 외관은 밝고 경쾌하다. 기이한 끝말잇기처럼 이어지는 그림도 그렇지만, 설치작업에 이미지가 섞여드는 경우 매우 화려하다.
작품에는 그런 것을 만들기 위해 오토포이 박사가 흘렸을 법한 땀과 눈물은 나타나 있지 않다. 오토포이 박사는 블랙 유모어를 구사할 때조차도 음울함과 폐쇄성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현대의 미술작가가 가지고 있는 많은 어려움은 절망과 우울로 점철된 작업을 양산하는 주된 이유이다. 일반 사회와 거리를 둔, 유폐된 조건 아래의 그들에게 바깥바람 이래 봤자 방관자 및 방랑자 입장에서 돌아다니는 여행자의 태도가 전부다. 그런 점에서 같은 조건을 가진 전업 작가 김동현이 매번 다른 도전을 요구하는 골똘하게 연구하는 작업 스타일 외에, 검도와 서핑을 즐기는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그러한 특이함이 자신의 긍정적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술은 다양한 연원을 가지는 에너지들의 유일한 수용체 및 증폭체, 변환체가 아닐까. 에너지의 구체적 전달 방식은 작품 속에 편재하는 ‘Cardioid System’에 근거한 원형운동이다.
그것은 원이나 구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상징적 사고와 연계된다. 아서 러브 조이는 존재의 대연쇄에 대한 이미지를 원이나 구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명백한, 이해하기 쉬운 단일한 구조를 가졌다. 원이나 구는 명확한 형태일 뿐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물체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단순하고 완벽한 형태라고 생각되는 구조이다. 그것은 우주와 정신의 모델이 되면서, 동시에 자아의 모델이기도 하다. 동양의 만다라에는 그러한 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이 연계된다는 신비한 사고는 유비적 사고의 특징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유비적 사고는 정신의 세계를 별들의 세계로, 그리고 별들의 세계를 월하의 세계로 연결하는 불가사의한 연쇄작용을 본다고 지적한다. 즉 위에 있는 것은 아래의 것과 비교될 수 있으며, 그 역도 가능하다. 이렇게 우주는 모든 것이 다른 것들을 의미하고 다른 것들에 반사되는 엄청난 유리의 방으로 인식된다.
연쇄는 무한하게 지속되며 해석은 무한해지는 상호작용의 미로이다. [해석의 한계]에 의하면, ‘유사함은 결코 안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으며 또 다른 유사함을 가리킬 때만 정착된다...유추가 증명되고 확실시되기 위해서는 전 세계를 주파해야만 한다’(미셀 푸코) 이를 통해 신비롭고 무한한 표류의 무대가 펼쳐진다. 에코는 표류의 대표적인 특징은 시니피에에서 시니피에로, 유사성에서 유사성으로 연결고리에서 또 다른 연결고리로 미끄러지는, 제어될 수 없는 온갖 수단과 방법이다. 궁극적인 시니피에는 접근 불가능한 비밀일 수밖에 없다. 지상에서의 안정된 삶을 위해 확실한 것에만 안주하는 기능적 사고에서 이러한 끝없는 진리의 세계는 부조리해 보일 뿐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생각할 때의 무리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을 뻔하게 보는 이는 예술도, 인간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조차도 그렇게 보며, 단순한 재생산자에 머문다.
그들이 재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존 제도와 권력의 재현이다. 그들은 이상적인 원형을 복제하고 전파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한다. 하기야 재현도 생성을 위한 바탕 면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존재 의미가 있다. 관계망을 더욱 넓혀가며 돌고 도는 세계를 표현하는 김동현의 작품은 동일한 지점으로 되돌아올 뿐인 기계적 반복이 아니다. 차이는 관념이 아닌 실행에서 발생한다. 계획과 실행, 말과 사물은 차이가 있다. 대부분은 계획이나 말, 또는 실행이나 사물 그 자체 만족한다. 그래서 세상은 만들지는 않고 떠들기만 하는 부류와 생각하지는 않고 만들기만 하는 부류로 나뉘어 있고, 이러한 부정적 이항대립과 타협이 지배한다. 그래서 현상은 유지되고 변화는 그렇게도 더디게 일어날 뿐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체계에서 변화는 사건으로 간주되며, 사건만이 변화를 야기한다. 차이가 있는 두 항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무엇인가 생성된다. 손으로 사고하는 이만이 그 중요한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Art Criticism
이선영 (미술평론가, 2015)
구르는, 또는 굴려지는 세계
김동현은 11월 말 열린 2015 창조경제박람회에서 2014년에 시작한 핀볼 머신 프로젝트를 위한 프로토 타입의 기계를 선보였다.
우주의 비의(悲意)를 품은 트랜스포머, 김동현
<서부의 건맨>처럼 폼 잡은 수염 무성한 로봇 할아범이 “난 산타, 왜? 무슨 문제라도?”라고 물으며 부릅뜬 눈으로 안광을 발하는 김동현의 작품을 보면 쿡 웃음이 터집니다.
작가가 특히나 강조하는 것은 세상 만물이 고유한 파동을 지닌 채 끊임없이 작용하고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체 작품, <퀀티엄 탱크>나 <노아의 방주>를 보면 독립 개체이던 알록달록 장난감들이 순식간에 조합하고 어울리며 변신합체의 축제를 벌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변신합체의 원리를 아인슈타인의 W=mc²를 패러디하여 H=mw²(H는 human, m은 man, w는 woman)라는 공식을 빌어 설명합니다.
다소 모지라고 공격적이지도 못한 로봇들이 휘어진 뿔을 서로 들이밀거나, 화염 부실한 무기를 휘저으며 허우적거리는 <몬스터 파크>는 상대성에 갇힌 우리네 에고ego들이 엎치락뒤치락 용쓰는 각축장의 모습일 것입니다.
변신 합체중인 로봇이 “I am becoming!”이라 외치는 것처럼 부단히 연관, 생성 중인 <몬스터 파크>는 광변무대 우주 그물망의 다른 모습이며 각각의 몬스터들은 개체 속에 서로를 비추며 우주를 품는 거미줄 위의 이슬 영롱한 트랜스포머인 것입니다.
Cultural Criticism
제미란 (문화평론가, 2010)
우주의 비의(悲意)를 품은 트랜스포머, 김동현
서부의 건맨처럼 폼 잡은 수염 무성한 로봇 할아범이 “난 산타, 왜? 무슨 문제라도?”라고 물으며 부릅뜬 눈으로 안광을 발한다.
유기적 세계의 가시화로서의 몬스터
1. 몬스터의 탄생
김동현은 괴물세계를 그린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악어, 새, 공룡, 로봇 등의 특정 형상을 닮되 그 형상을 변형시키거나 재탄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유기적 세계와 유희에 관하여
작가는 “나에게 몬스터라는 존재는 프로그램화 된 인간을 자극함과 동시에 돕는, 시공간을 초월한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 일종의 전령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이미지를 통하여 세계와 대화하는 코드를 찾아낸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것은 동중서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이나 샤마니즘의 접신(降神)과 근접한다.
3. 김동현의 역설
사실, 김동현의 회화가 론 프릭크 감독의 다큐멘터리 바라카(baraka, 1992)와 일정부분 오버랩핑되고 있는데, 가시적인 산업사회의 물질성을 기본적인 대전제로 드러 낸다라면 본질적으로 인류의 문명에는 원형적인 신성과 범우주적이며 제의적인 힘이 내재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작가는 아이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놀이적 도구, 유희의 로보트, 동물, 괴물들을 등장시키며 눈을 감은 아이 적 동심과 순수성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자연이 들려주는 지구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느끼며 그 파장을 느낄 때 우리는 본연의 깨달음을 얻게 되며 그것은 접신과도 같이 최고의 유희적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Art Criticism
박옥생 (한원미술관 큐레이터, 2010)
유기적 세계의 가시화로서의 몬스터
김동현은 괴물세계를 그린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은 악어, 새, 공룡, 로봇 등의 특정 형상을 닮되 그 형상을 변형시킨다.
몬스터, 천개의 감정 천개의 에너지
긴 속눈썹을 자랑하는 외눈박이, 길쭉하게 늘어진 팔, 회전을 멈추지 않는 나선형의 형상들, 동그랗게 튀어나온 돌기, 화면가득 불을 내뿜고 있는 커다란 입, 일련의 방향성을 갖고 촘촘히 그려진 털 등 서로 다른 얼굴과 움직임을 보이는 갖가지 몬스터들은 조금의 여백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사각의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쥬라기 공원을 연상시키듯 ‘몬스터 파크(Monster Park)’라는 소재답게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룡, 개구리, 악어, 로봇, 코끼리, 용과 같은 이미지들을 찾아 낼 수 있다.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듯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것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감각’ 그 자체이다.
2001년 첫 개인전 이후, 막막해진 작가는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작업실에서 오로지 조형에 관한 연습을 통해 작업이 가지는 의미를 탐구하고자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상호간의 ‘관계’란 절대불변의 고정적이고 단일화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에너지의 교류에 의해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다.
파울 클레가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세계를 가시화” 하는 것이라 말했듯 작가란 분명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구체화하여 보여주는 사람들일 것이다.
관점의 차이가 아닌 차이 자체에서 관점이 발생하듯 작가 김동현은 마치 ‘날것’과도 같은 서로 상이한 접점들을 여과 없이 평면위에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Exhibition Review
김진섭 (성곡미술관 큐레이터, 2010)
몬스터, 천개의 감정 천개의 에너지
긴 속눈썹을 자랑하는 외눈박이, 길쭉하게 늘어진 팔... 갖가지 몬스터들은 조금의 여백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